류현진이 2021시즌 개막전 선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다는 몇일전 뉴스로 알았다. 언제부터인가 개막전 선발 투수라는 것은 팀의 에이스를 뜻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예전 한국 프로야구의 경우 변칙적으로 투수 운용을 하는 경우가 많아 예상하지 못한 투수가 개막전 선발로 오르는 일도 있었지만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에이스가 개막전에 오른다. 그런면에서 류현진이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온다는 것은 국뽕에 어느 정도 중독되어 있는 나에게는 피를 끓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피가 끓어 오르면 평소에는 잘 못하는 일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하는데 오늘 새벽이 그러했다.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만 새벽 3시에도 쌩쌩함을 유지하며 TV 앞에서 류현진의 개막 경기를 지켜보았다.
일단 오늘 경기는 류현진 아니 토론토팀 자체가 매우 어려운 경기를 하지 않을까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이유는 상대팀이 '악의제국'이라 불리우는 막강 뉴욕양키즈이기 때문이다. 류현진 말고 다른 팀의 다른 투수들도 모두 비슷하겠지만 류현진 역시 양키즈 앞에서는 웬지 초라하고 불안한 모습을 많이 보였었다. (성적이 그렇다는 것이지 포카페이스의 류현진 실제 표정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가뜩이나 내야수비가 불안하다는 평을 많이 듣는 토론토의 경우 예전처럼 평범한 땅볼 하나를 황당하게 빠트리는 허술함을 보였다가는 막강 양키즈 타선에 기름을 붓는 효과를 줄 터이니 '올해 수비는 어떨까나?' 하는 불안함으로 출전선수 명단을 세심히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년에 2루로 많이 뛰었던 비지오가 수비적으로 약점을 보이던 트레비스쇼가 밀워키로 간 3루에 입성한 것이 눈에 띌 뿐 특이한 점은 없다.
어차피 야구는 투수놀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결국 류현진도 중요하지만 양키즈의 투수도 중요한데 오늘은 에이스의 날이니 양키즈 선발은 에이스 중에 에이스 게릿콜이다. 게릿콜하면 강정호가 피츠버그에서 훨훨 날고 있을 때 피츠버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였다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그 때도 무지하게 잘 던졌지만 이제는 완성형 에이스로 160킬로가 넘는 공을 지치지도 않고 마구 계속해서 던지는 피칭머신으로 진화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를 받는가?'라는 것은 계급이기도 하고, 예외는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게릿콜이 양키즈를 가면서 9년 3억2천4백만 달러로 계약했는데 한국돈으로 환산하면 3천6백억이 넘는 돈이니 게릿콜의 가치가 어떠한지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상대 투수가 이런 사람이니 양키즈의 타선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오늘 경기는 어려운 경기일 것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 과장된 생각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류현진은 류현진이다. 명불허전 이다. 류현진의 2020시즌 주무기는 체인지업과 커터였다. 두개의 변화구가 전체 피칭 구성의 약 60%를 구성할 정도이니 이 두 구종의 위력은 대단하다. 타자가 이 변화구에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섞어 던지는 속구(포심)는 그 구속과 상관없이 위력이 배가되었음은 굳이 또 언급할 필요가 없다. 2020년의 투구 스타일에 대해 완벽하게 분석할 것을 예상해서인지 오늘은 속구의 비중이 유독 높았다. 물론 시즌 초이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힘이 있어 속구의 위력이 있다고 판단 하였을 수도 있으나 게릿콜의 160킬로를 넘나드는 속구에 비하면 146~147킬로의 류현진 속구는 속구라고 부르기 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그러나 현란한 변화구와 속구의 조합은 '역시 유현진이구나!'를 증명한 경기였다. 2회에 빗맞은 안타에 이은 홈런으로 2실점한 점은 옥에 티였으나 개막전이라는 엄청난 중압감과 게릿콜이라는 거인과의 격돌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안하고 이 경기를 평한다면 훌륭한 경기였다.
오늘도 느낀 점이지만 류현진의 최대 강점은 유연함, 팔색조라 불리우는 다양한 구종, 구종별 투구폼이 일정함 등과 같은 신체적인 장점이 아니라 돌부처도 놀랄 만한 강한 멘탈이 아닌가 싶다. 애런저지나 스탠튼같은 괴물타자 앞에서도 140킬로 중반의 상대적으로 초라한 속구를 정면에 꽂아 넣는 대담함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개막전에서 느릿느릿한 공으로 강력한 상대를 흐물흐물하게 주무르는 모습은 예전 OB 베어스의 장호연을 떠올리게 한다. 1983년부터 1995년까지 13시즌 동안 OB에서 뛰다가 은퇴한 장호연은 선수 생활 13시즌 중 개막전 선발 등판을 9번이나 했으니 개막전 성적이 어떠했는지와는 상관없이 개막전의 사나이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개막전 성적도 6승2패이니 성적만으로도 뛰어 났지만 나에게 강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1988년 개막전 노히트노런 사건이다. 구속이 140킬로도 나오지 않고 손가락이 짧아 전통적인 변화구도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투수가 빼어난 수싸움과 든든한 배짱으로 단 99개의 공으로 롯데자이언츠를 노히트노런으로 농락한 그 경기는 나에게 투수라는 개념을 바꾸어 준 경기였다. 오늘 류현진에게서 그 옛날 능글능글한 모습 때문에 '짱꼴라'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던 장호연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승패 없이 5와 1/3이닝 2실점이니 에이스로서 마음에 차는 성적은 아니었지만 양키즈라는 강팀과 개막전에서 거둔 성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A학점을 줄 수 있는 투구였다. 거의 비슷한 성적으로 마무리를 한 게릿콜이 불펜에 들어와서 성질을 내는 모습에서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타 하나를 치지 못하고 지고 만 롯데 선수들의 짜증에 쩔은 88년 개막전 모습이 보이는 듯하여 아련한 추억에 젖는다. 밤을 꼬박 세었더니 피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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