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년 이전 리뷰/오늘의 프로야구 결과와 리뷰

'하기룡' 그를 기리며...

반응형

하기룡이 선수로써 마지막 마운드를 내려간 것이 1989년이니까 하기룡 선수를 기억하는 사람은 꽤나 나이가 드신 분이아닐까 싶다. 얼마 전 하기룡감독의 부고 뉴스를 보고 아직 돌아가실 연세는 아니실 텐데 하며 자료를 찾게 되었다. 1955년 생이니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정도의 나이인데 2021년 2월에 돌아가셨으니 너무 일찍 영면에 드신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80년대를 대표하던 투수의 조금은 초라한 퇴장을 그저 지나칠 수는 없어 그에 대한 기억을 끄적여 보고자 한다.

키 177센티미터에 통통한 몸매. 요즘 야구선수와는 조금 다르다

하기룡은 실질적으로 MBC청룡의 에이스로  마무리투수, 필승계투조, 추격계투조와 같은 투수 분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초기 프로야구 시절에 가장 필요했던 완투형 투수였다. 그는 배재고등학교 출신으로만 학력이 간단하게 표기되어 있으나 사실은 부산사나이다. 어린 시절에는 타고난 운동능력이 뛰어나 육상선수였다고 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하기룡의 몸매는 육상선수와는 거리가 있다. 야구 선수로 활약하던 부산고등학교 시절 재창단 수준으로 전열을 정비하던 배재고에 스카웃되었으나 부산고등학교가 팀의 에이스를 순순히 내어 놓지 않아 1,2학년에는 거의 야구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73년 3학년이 되어서야 배재고 유니폼을 입고 고교 첫 대회인 청룡기에 나갈 수 있었는데 이 때 1차전에서 만난 팀이 광주상고다. 광주상고와의 경기에서 하기룡은 그 동안 야구를 하지 못한 한을 풀듯이 투수로, 타자로 맹활약하며 배재고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광주상고는 하기룡이 부산고등학교에서 배재고등학교로 전학하면서 학적 정리가 늦어진 점을 들어 부정선수라는 이의를 제기했고 이의가 받아들여져 하기룡은 갑자기 사라져야 했다. 당시 언론에서도 '하기룡, 홈런치고 사라져.'라는 내용으로 기사를 썼다고 할 정도이니 그 활약에 비해 갑작스러운 퇴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봉황대기가 되어서야 출장 금지가 풀리면서 활약이 가능했다고 하니 이제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선수에게 너무 가혹한 시간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가혹한 시절 중에 에이스 하기룡을 확인할 수 있는 큰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한일 고교선발 야구 교류전'이다. 1973년 당시 한일간의 야구는 수준 차이가 좀 있었다. 물론 일본이 훨씬 잘 했지만 한일전은 당시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당시 일본 고교선발에는 '괴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에가와 쓰구루라는 투수가 있었다. 에가와 쓰구루는 고교시절 150킬로가 넘는 속구로 노히트노런 9번, 퍼펙트 2번을 달성한 어마무시한 선수다. 이후  요미우리자이언츠에서 프로야구 생활을 하며 135승을  거둔 명투수로 성장했다. 가뜩이나 일본 고교팀과 수준 차이가 있었는데 이런 투수까지 버티고 있었으니 한국 고교팀이 쉽게 패배하리라는 예측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교류전에서 하기룡은 17이닝을 던지면서 방어율 0.06으로 일본 고교팀에게 쓰디쓴 패배를 선사하며 활약했다. 고교시절 불운함으로 우승을 한번도 할 수 없었던 분노를 일본에 다 푼 것 처럼 보인다.

 

고교를 졸업하고 1974년 상업은행에 입단하여 프로야구가 출범하던 1982년 MBC 청룡에 입단할 때까지 에이스로 활동했다. 군복무를 제외하면 프로야구 출범 전까지 상업은행에서 야구선수로 활동했던 기간이 5년 남짓이었는데 5년 중 실업야구리그에서 3시즌 우수투수상을 받았으니 그의 아마추어 시절 활약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82년 언론 자료에도 원년 우승팀에 대한 예상 기사가 많았다. 2021년 프로야구 우승 예상팀이 NC와 LG라면 1982년 예상팀은 삼성과 MBC였다. 삼성은 전원 국가대표급의 라인업이었기 때문에 단연 우승 후보였고 MBC는 강력한 타격이 돋보이는 팀이었다. 타격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어느 정도 투수력이 뒤받침되지 않으면 우승 후보가 될 수 없는데 MBC는 하기룡이 있었다. 역사적인 프로야구 원년 개막 경기가 삼성 vs MBC 경기인 것은 우승 후보끼리 첫 경기를 하여 팬들이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치밀한 의도였다. 이런 개막경기 중에 개막경기에서 하기룡이 MBC의 선발투수로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쉽게도 경기 당일 복통으로 개막식 선발을 이길환에게 넘겼지만 하기룡이라는 투수에 거는 당시의 기대를 추정할 만 하다.  MBC의 원년 투수 라인업은 하기룡, 이길환 더블 에이스에 유종겸, 이광권, 정순명이 뒤를 받치는 구조 였다. 이런 취약한 구조 였기 때문에 하기룡은 시즌 경기수가 총 80경기이던 당시에 191이닝을 던지며 활약했다. 80경기 중 43경기에 나와 공을 던졌으니 당시의 열악함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참 대단하다. 83년 들어 오영일이 신인으로 가세하면서 MBC는 하기룡, 이길환, 오영일 3명의 10승대 투수를 갖추게 되었고 1985년 김용수, 정삼흠 1986년 김건우, 김태원이 입단하면서 팀의 근간이 만들어 졌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하기룡은 꾸준히 에이스로 활약했다. 

 

하기룡은 1989년까지 7시즌 동안 50승 43패 16세이브를 기록했다. 이 기록만으로도 준수한 성적이라 하겠으나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 가운데 완투가 28경기였으며 완봉승도 9경기나 있었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기록은 83년 41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이다. 이 기록은 이후 선동렬이 49와 1/3 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면서 깨어졌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넘사벽의 기록이었다.

83년 코리안시리즈 3차전에 중간 계투로 드디어 등장한 하기룡

내가 하기룡을 기억하는 장면은 1983년 코리안시리즈 3차전이다. 1983년 코리안시리즈는 10월 초에 발생한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연기되고 일정을 갑자기 조정하는 바람에 무척 혼란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전기리그 끝나고 휴식기간 중 전기리그 우승팀인 해태의 4번타자 김봉연이 큰 교통사고를 당해 얼굴을 100바늘 이상 꿰메는 사고가 발생하고 후기리그 우승팀인 MBC는 우승 보너스 문제로 구단과 코칭스텝, 그리고 선수간 갈등이 발생하는 등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1, 2차전 모두 에이스 하기룡을 선발로 투입하지 않고 2패를 연속해서 당한 MBC는 3차전에서도 선발로 하기룡이 아닌 이광권을 투입하여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해설자는 '이해할 수 없는 투수 운용입니다. 이건 아니죠.'라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결국 3회 무사 2,3루의 위기가 되자 아껴두었던(?) 하기룡이 투입되었다. 아마 더 이상 패배하면 시리즈를 바로 내줄 수 밖에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타자는 공교롭게도 올해 큰 교통사고를 당했던 김봉연이었다. 나오자 마자 던진 초구에 김봉연은 거침없이 특유의 골프 스윙을 했고 공은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이 때 하기룡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억울한 듯 보이기도 하고 지쳐보이기도 했던 하기룡의 표정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83년 코리안 시리즈에서 맹활약한 김봉연은 시리즈 MVP까지 거머쥔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기룡은 20대 후반 나이에 프로야구에 뛰어 든 것이다. 지금이야 30대 중반, 혹은 후반까지도 선수 생활을 하는 프로 선수들이 있지만 당시에는 30줄만 넘으면 은퇴하던 시대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하기룡은 전성기가 조금 지나는 시점에 프로야구에 데뷔했음에도 MBC의 에이스로써 그 역할을 훌륭히 했다고 생각한다. 1990년 MBC가 LG에 매각되면서 은퇴한 하기룡은 MBC에서만 뛰었다. 나는 MBC를 대표하는 선수로 하기룡을 기억한다. MBC청룡 마운드를 지키던 열혈 에이스 하기룡님이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기원해 본다. 

반응형